안녕하세요, 나영 입니다.

벌써 5번째 레터를 쓰고 있네요. 얼마나 레터를 더 쓰게 될지 모르겠어요. 확실한건 10개보다는 많을 것 같아요. 올해는 밤에 맛이 드는 속도가 더딘 편이네요. 밤의 품종이 달라졌으니까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루틴을 그대로 밟습니다. 밤을 잠에서 깨워 센 불로 가열하기 시작합니다.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서 은근한 상태로 만듭니다. 다만 어제와 달리 오늘은 3분을 졸입니다. 원래 설탕과 물을 1:1로 시작해야 하는데, 저는 1.2:1로 시작했으니 물기가 많아서 조금 더 끓여주어도 괜찮았거든요. 살짝 물기를 날렸으니 오늘부터는 3분으로 줄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끈적한 시럽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힘을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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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끓이기 직전의 밤인데요, 밤의 가장자리가 약간 투명해진 것이 보이시나요? 매일 저 부분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지켜보면서 완성의 타이밍을 잡을 수 있어요. 타이밍을 놓치고 하루 이틀 더 가열하게 되면 밤이 금방 딱딱해집니다. 제 첫 번째 마롱글라세처럼요. 아직은 아주 가장자리 부분만 투명해지는 중이라 굳이 맛보지 않아도 괜찮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깨진 조각을 하나 먹어봅니다.

아직은 익힌 밤의 퍼석한 식감이 더 강하고, 시럽의 단맛도 강하지 않습니다. 그냥 삶은 밤을 시럽에 찍어먹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맛있습니다. 달고, 향긋해요. 아주 연하지만 후추의 매운맛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의외로 바닐라와 후추의 조합이 좋네요. 바닐라빈이 점점 퍼져서 밤의 패인 골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보여요. 사진의 검은 덩어리들이 다 바닐라빈입니다. 이대로 잘 완성되어준다면 올해의 마롱글라세도 성공적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간단하게 하는 일상의 요리들이 있다면, 이렇게 마음을 함뿍 담아 만드는 요리들도 있죠. 만드는 과정이 긴 만큼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요, 이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만이 가지고 있는 묘미가 아닐까 해요. 긴 시간이 필요한 요리를 할때면 아오이유우가 출연한 일본 드라마 오센(2008년)을 떠올립니다. 제가 요리를 공부하기도 전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드라마인데, 좋아하는 요리를 할때면 아직도 이 장면이 눈앞에 자동으로 재생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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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센은 요리를 할때마다 "오이시쿠나레(おいしくなれ)" 하고 나직이 속삭입니다. 사진 속의 자막처럼 '맛있어져라'라는 뜻이라고 해요. 그때는 마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요리를 하고 있는 지금은 맛있어지라는 마음을 담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클래식을 틀어준다거나 칭찬을 매일 해준다고 물이 더 건강해진다고 믿지는 않지만, 제가 요리하는 순간의 행복이나 즐거움이 요리에 담긴다고는 믿습니다. 그래서 요리를 할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좋아하는 술을 따르고, 엉망진창의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기도 합니다.

저는 워낙 리액션이 큰 편의 사람이지만, 요리를 할때는 조금 더 과한 리액션을 하려고 해요. 재료들이 요리되면서 들으라구요. 오센의 말이 "맛있어져라"였다면 저의 말은 "귀엽다"입니다. '귀여움'은 사랑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가장 궁극의 감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만 하는 대신 오늘도 굳이 소리내어 말해봅니다.